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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론

한국 단청의 역사1 - 삼국시대 단청

by 바아냐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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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삼국시대의 단청은 어땠을까요. 오늘은 한국 단청의 역사 1편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단청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삼국시대의 단청

1. 고구려의 단청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분 주인의 집구조나 생활 풍속을 알 수 있는 인물풍속도와 종교화 그 밖의 기하학적이거나 추상화된 문양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고분의 벽화는 고분이 위치한 고구려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인접한 서역 계통의 회화적 기법 이 혼재되어 복합적인 화풍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벽화를 통해 문화 당시 지배계층의 생활모습, 건축서법, 신앙 등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묘실에는 당시의 건축 양식과 단청의 양상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의 건축물에는 귀접이천장, 기둥, 공포, 창방 등을 표현하고 공포의 벽에는 비천상, 연화문, 기수 등이 그려졌습니다. 후기의 고분벽화는 도교의 영향으로 사진도 위주로 벽화가 장식되었습니다. 사신도는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로 배치되어 오행사상의 색상방위에 따른 사신수호의 모습을 표현하는 그림입니다. 이는 단청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최고의 화법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평가됩니다.

 

고구려 시대의 단청 유례로는 각저총, 마선구 1호분, 악악 3호분, 감신총, 덕흥리 고분, 용강 대총, 수산리 고분, 진파리 1호분, 통거우 사신총, 강서 우현리 대묘, 무용총, 삼실총 등이 있습니다. 

 

 

고구려고분벽화-사신도-북현무
출처, 네이버,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 북현무

 

2. 백제의 단청

 

백제는 바다를 통하여 진나라를 비롯한 중국 본토의 태, 후연 등 오호십육국 등과 직접 교역하여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이웃 신라와 멀리 일본에까지 그 문화를 전하여 아스카 문화를 열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서기 284년에는 왕인 박사가 백제인으로는 처음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가르쳤습니다. 이를 필두로 의술, 역학이 전해지고 화공, 와공의 기술을 일본에 전파했습니다. 서기 460년에는 백제의 화공 인사라아와 진귀가 일본으로 건너가 불화를 그렸고, 588년에는 화공 백가가 옥추중자에 밀타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왕자 아좌태자는 일본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597년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백제 성왕 19년(541년)에는 중국 양나라에서 건너온 모시 박사 일행과 함께 온 화사에 의해 전통화법에 새로운 외래화법을 도입하여 화업이 더욱더 발달되었습니다. 더불어 당시의 회화의 발전도 놀랄만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백제 단청의 유례로는 공주 송산리 고분 벽화,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가 있습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 벽화는 전축분으로 진흙을 칠하여 밑바탕을 만든 후에 주작도(사신도)를 그렸으며 후자는 석실분으로 돌에 직접 사신도와 비운 연화도를 그렸습니다. 부소산 절터에서는 청색, 적색, 백색, 흑색으로 그려진 새의 형상을 발견했는데, 이는 벽면에 호분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더불어 산경문전, 연화, 번룡, 와운문전 등의 독특한 도안을 보아도 백제의 단청은 그 기량이 매우 우수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3. 신라의 단청

 

신라는 지역의 고립적 특성상 다양한 문화의 수용이 늦은 반면 독자적이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족 공예품, 건축물, 탑, 불상 등의 유례를 통해 신라의 단청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는 단청일을 맡아하던 화공들이 있었고 그들은 관서인 채전서에서 소속되었습니다. 솔거와 같은 화원에 의해 벽화가 그려지고 불가에서는 활발하게 화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이후 통일 신라에 이르러 불교 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라의 귀족들은 그들의 지배체제를 지속하길 원했으며 그 염원이 담긴 문화유산이 아직도 경주를 비롯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신라의 전성기에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가옥은 금으로 현란하게 장식했고 일반 서민의 것도 자유롭게 치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통일 신라 말기에는 일반 주택의 단청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왕궁과 사찰에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왕권이나 종교의 권위를 지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삼국사기 「옥사조」를 보면 당시에 진골 이외의 육두품 이하로는 금제로서 단청을 하지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천자나 천손, 즉 하늘의 아들이라 칭하였던 왕이 거처하는 곳이나 제석신이 거처하는 전당에는 항상 오색구름이 둘러싸여 있는 것과 같이 화려하게 단청하였던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신라의 단청은 경주 신무왕릉 삼릉석실 고분에 단청된 벽화에서나 경북 중주군 순흥면 '어숙묘'의 인물상과 연도의 천장 연화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덕 여왕 때 흥륜사 법당에 금색으로 벽화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경주의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유물 중 기와의 암막새 끝쪽에 칠하여진 주칠 흔적과 막새기와 및 전돌의 문양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단청의 문양이 얼마나 섬게하고 아름다웠을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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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곽동해 지음 · 김동현 감수 < 한국의 단청>, 학연문화사, 2002

임영주, 전한효 편저 <우리나라 단청1>, 태학원, 2007

임영주, <단청>, 대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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