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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론

한국 단청의 역사3 - 삼국시대, 고려, 조선 역대 단청 기관

by 바아냐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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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단청의 역사 있어서 역대 단청 기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국가가 형성된 이후 각 부서 체계가 형성되면서 이와 유사한 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왕궁이나 국가의 일에 동원되어 각종 그림을 그리거나 단청을 행하가기도 했을 것이다. 문헌이나 기록상으로 볼 때 당시 왕궁이나 사찰들의 규모가 작지 않았으므로 삼국 모두 화원 양성이 있어 국가적인 지원을 펼쳤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삼국시대의 단청 활동

 

삼국시대에는 단청기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화나 공예, 조각 등의 부서를 총괄하는 기관의 한 부서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기준에서 화원들도 단청이나 불화 제작에 참여했던 점을 보면 그 이전에도 그림을 하던 이들이 단청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고 기록을 보면 일본 법륜사의 벽화를 그린 고구려의 화사 담징과 황문화사, 산배화사 일족이 일본에서 활동했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는 고분 벽화의 유구를 통해  당시의 화공들의 수준 높은 단청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백제의 단청은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와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의 '사신도, 연화문, 비운문' 등의 형상을 통해 화공들의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는 문헌상 7세기 중엽 화운을 관리했던 '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옥사조'의 가사에서 성골 외에는 단청을 금지했던 사실로 보면 왕궁이나 사찰의 단청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문화적 자신감이 커지고 각 부서들이 체계화 되면서 화원기관 역시 첨차 확대 되었다. 

 

 

고려의 화국

 

고려의 '화국' 역시 관에 부속된 회화기관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미 7세기 중엽 신라에 그림을 담당했던 '채전'이 있었고, 고려의 헌종, 인종, 명종과 충선왕, 공민왕 등 그림을 직접 그리며 즐길 정도로 좋아했다는 기록과 당시 활동했던 이영과 이광필 부자와 이기, 고유방, 박자운 등의 화원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그림 그리는 부서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송 휘종과 교류하면서 사랑을 받은 이녕에 관한 기록들에서는  「예성강도」에 대한 극찬과 송의 '한림도화원'에서 그림을 직접 지도한 사실이 전해진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한림도화원'과 같은 화가 양성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고려도 '도화원'과 같은 화원 기관을 두어 발전해 왔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인로의 「파한집」에는 이녕이 '화국'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는 이녕이 궐내 도화원의 책임자로 활약했다고 추측되는 기록도 남아 있다. 

 

송의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궁궐 '만월대'가 금벽단청으로 화려하고 궁성문을 '신봉문'이 가장 화려하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전대의 그림이나 문양 등이 실용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고려에서는 단청의 장식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녕의 '청수사 남문도'와 '예성강도', 이광필이 명종 명으로 그린 '소상팔경도'와 같은 실경 산수화 작품이 그려지는 등 회화의 감상적인 성격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원들에 의해 산수, 인물, 불교회화 등이 활발하게 그려졌다. 왕실의 후원으로 왕과 왕비, 귀족들의 초상화와 불화 역시 화원들에 의해 수도 없이 그려졌다. 

 

처마부-서까래-단청
출처, 픽사베이, 처마부 서까래 단청

 

 

조선의 도화서

 

도화서는 조선 시대의 화원 및 화공들을 관장했던 관청으로 화원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양성했던 기관이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 개국 후 8년에 도화원의 존폐에 관한 논란이 기록되었다. 태조 때부터 고려의 도화원을 본받아 도화서가 설치 운영되어 구한말 마지막 화원으로 활동한 심전 안중식까지 계승되어 왔다. 

 

도화서는 국가와 왕실 사대부 등 유교적 역량 아래서 문인의 취미와 궁정 취향의 그림을 그리는 곳으로 예서에서 관장해 왔다. 화원들은 시험을 통해 선발하고 진급 또한 시험에 의해서 결정 되었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 등의 기록에 의하면 시제나 도화서의 편제 등이 나오는데, 화원을 선발할 때 시재는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 화웨 등으로 구분되어 두 가지를 택해 시험을 치렀다.

 

대나무가 1등급, 산수 2등급, 인물과 영모가 3등급, 화훼류가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대나무와 산수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는데 이는 유교를 숭상하는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경국대전」 '예전'편에 나오는 직책은 종 6품의 선화, 종7품의 선회, 종 8품의 화사에 각 1명씩 두었고 종 9품의 회사는 정원이 2명으로 도화서의 가장 낮은 직급이었다. 예조 소속에 1 명의 그림을 배우는 학도인 화학 생도를 두었는데 영조 때 30명으로 증원시켜 화원을 양성했다고 한다. 

 

도화서의 장은 '예조판서'가 겸임하고 종 6품인 별제 2명도 대부분 그림을 잘 아는 사대부가 임명 되었으며 그 밑에 잡직인 화원을 두어 운영 되었다. 화원들은 대부분 그림을 업으로 살아가는 중인 계층으로 녹봉을 받아 생활하면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소질 있는 화원들은 퇴임 후 그림을 그리면서 녹봉을 받기도 했다.

 

국왕의 특명으로 면천되어 화원이 된 학보 이상좌나 정 4품의 호군까지 오른 현동과 안견, 정조의 어진 제작 공의로 양천 현감이 되기도 했던 김홍도 등 출세한 도화서 출신의 화원들이 많았다.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

 

  1. 연초에 궁실의 문이나 문무관에게 왕이 하사하여 붙이는 '세화'(실력에 따라 장수가 정해져 연말까지 그려 제출), 벽사용으로 처용상, 용, 호랑이, 금, 갑, 신장상, 오봉산 일월도, 십장생도 등
  2. 어진과 초상 등(전신화와 미인도)로 어진은 중기 이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후기에 이르러 18세기 육리문 등과 같은 전이모사로 동양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 조영석 강세황 등 그림에 뛰어난 화원들이 화원들을 지휘 감독
  3. 의궤, 교과서, 도설 등의 도판 그림이나 지도그림(산수 형식이나 산천 그림)
  4. 능행도, 전시도, 순절도, 효자도, 열녀도, 충신도
  5. 감상용인 산수, 화조도, 영모도, 기명도, 문방도, 책거리도
  6. 국가적인 행사나 공사에 파견되어 단청이나 벽화를 그림, 궁문에 화원들이 동원되어 세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선화, 선회, 화사 등이 화원들을 가르치며 때로 단청현장에 파견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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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곽동해 지음 · 김동현 감수 < 한국의 단청>, 학연문화사, 2002

임영주, 전한효 편저 <우리나라 단청1>, 태학원, 2007

임영주, <단청>, 대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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